2021

2022년 1월 1일의 새해, 고성 수뭇개바위에서.

마무리하며

2021년을 시작할 무렵, 지나온 2020년을 기록하고자 마음먹었더랬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삶에 치여 살다 보니, 점점 잊혀가는 지난날들을 떠올리기 귀찮아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2021년이 지나 2022년이 되었다.

별안간 그저 그렇게 지나온 시간들인 줄 알았던 2021년을 되돌아보니 참 많은 것을 경험하며 실패도, 성공도, 성취도 느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실패라는 쓰디쓴 맛을 본 것, 그리고 나에게도 무엇인가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 지난 2021년 중 가장 뜻깊고 소중한 순간들이 아닌가 싶다.

덕분에 나의 가치관도 큰 폭으로 뒤집혔다.
내 삶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온전히 나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과 동시에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 꿈과 목표는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결을 가졌다는 것,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희생은 꼭 뒤따라온다는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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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

2020년 12월 말에 입사했지만 본격적으로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업무를 본 건 1월부터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내가 겪는 첫 사회생활이었고, 무엇보다 지난 2020년 동안 이 '개발자'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공부했던 것을 생각하면 참 감개무량했던 한 달이었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삶과는 확연히 다른 매일, 뒤죽박죽 한 지난날들과는 다르게 매일을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큰 로망이었다. 그리고 직접 그 로망을 경험해보니 행복했더랬다. 안정은 인간에게 가장 큰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뮤지컬 배우로서의 삶은 '안정'이라는 키워드와 굉장히 동떨어져 있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일을 기다리는 것, 당장이라도 잘릴지 모르는 아르바이트를 유지하는 것, 전염병이 돌아 직업을 잃을 수 있다는 것, 그것들은 참 인간을 금방 지치게 한다. 나 또한 이런 불규칙한 일상의 반복에 지쳐 나가떨어진 유형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만큼 '안정'이라는 키워드를 내 삶에 끼워 넣는 것은 참 중요했고, '개발자'라는 타이틀이 주는 그 '안정'은 달콤했다.
특히나 매달 말일마다 통장에 따박따박 박히는 월급 또한 참 감사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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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4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나는 또 다른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스타트업'이라는 컨템퍼러리 한 타이틀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개발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개발은 내 성장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다만, '체계'가 없다는 것은 나에게 큰 데미지를 입혔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스타트업인데, 네가 체계를 만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라고.
내가 겪은 바, '체계'를 만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인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삶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너무 좋았지만, 사람 좋은 것과 같이 일하기 좋은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니까.

그래서 멘토링을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다.
지난 2020년 동안 나름대로 새로 시작한 영역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내겐 성취에 대한 욕망이 꽤나 큰 파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멘토링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즐겁기까지 했다.
멘토링을 그만두기 전 3개월 동안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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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8

멘토링 진행 당시 참 많은 것을 하고 있었고, 이것들을 꼭 해야 한다는 욕심이 가득했다.
할당된 진도만큼 프로그래밍 공부하기, 매일 러닝 2시간 뛰기,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행하며 사진 찍기,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여자 친구와 잠깐이나마 퇴근 드라이브하기, 친구들과 스터디 진행하기 등.

처음 이직을 결심하고 멘토링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마음들(우선순위에 대한 것들 등등)은 취미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와해되기 시작했고, 한정적인 시간들 사이에서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해내고자 하다 보니 결국 내 멘탈과 체력은 산산조각 났다.

당시에는 프로그래밍 공부와 이직이 내게 가장 높은 우선순위였는데, 3개월이 지나고 나니 러닝, 사진, 여행 등 취미 생활들로 우선순위가 바뀌기 시작했고, 결국 멘토링 취소까지 하게 되었다.
우선순위가 바뀌니까 자연스럽게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됐고, 결국 개발자의 길이 맞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됐는가, 내가 목표한 곳에 도달하기까지 빨리 이루고 싶은데 프로그래밍 공부라는 것은 그렇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취를 잃게 되면서 내겐 재능이 없나 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멘토링까지 그만두고 환불받은 돈으로 카메라까지 사면서 취미생활을 이어갔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가진 모든 욕망들을 채워지기보다, 오히려 어딘가 결핍되고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왜 그런지 알지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멘토링을 그만두고 9월부터 11월 말까지 (지금에서 하는 말이지만) 허송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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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11

9월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에 미쳐 살게 됐고, 당시에는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진 업계로 이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겐 사진 업계가 대체 어떤지 알 수 없어서 인스타그램 팔로워 중 한 분께 부탁해 웨딩 보조 촬영 알바를 시작하게 됐다. (이 일은 내게 엄청난 트리거가 된다.)

생각보다 사진을 찍는 일 자체는 즐거웠고, 이렇게 즐거운 일을 하면서 돈까지 받는다는 것은 참 좋구나 느꼈다.
하지만 나는 솔직한 스타일이다. (물론 회사 업무 시와는 별개로.) 게다가 입에 발린 말을 지극히도 싫어해 그런 상황이 와도 웃음으로 넘어가는 사람인데, 사진 업계에서 고객의 니즈를 충족하고 그걸 통해 벌어먹고살기 위해서는 '알랑 방귀'라는 재능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상업 사진 업계는 예술적 가치로써의 성취를 이루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고, 뮤지컬학과를 졸업하고 뮤지컬 배우로 데뷔해서 현재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내겐, 사진 업계는 정말 나와 맞지 않는 생태계였다.

그렇게 웨딩 보조 촬영 알바를 하며 사진 업계로의 이직은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고, 결국 프로그래밍도 사진도 아니라면 대체 내가 잘하면서 즐겁게 벌어먹고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면서 나를 무기력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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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그렇게 무기력한 상태로 12월에 접어들었고, 결국 나는 이도 저도 이루지 못한 채 회사의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가게 됐다.
이번 프로젝트는 기존의 데이터 베이스 구조를 새롭게 리모델링해서 2.0으로 버전을 업그레이드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는데, 규모가 크다 보니 기존의 어드민을 포함해서 협력사 어드민과 글로벌 어드민까지 개발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고, 나는 평소처럼 개발을 진행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주로 프론트엔드 영역을 맡아 개발을 진행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 코드를 작성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은 생겼으나, '프로그래밍에 재능도 없는 애'라는 생각에 주저하고 있던 찰나, 나 때문에 멘토링을 시작한 친구의 블로그를 구경하게 되었고, 모든 글들을 정독하면서 '나, 다시 하면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해보자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다시 마음을 다 잡고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행복을 바라서 생긴 것도, 이곳을 탈출해 더 나은 곳으로 이직하기 위해서도,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맡은 일을 더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붙잡게 된 것이다. 성취를 위한 욕망에 의한 것이다.

그렇게 12월 한 달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공부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고, 조금 더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 카메라도 처분했다.
카메라를 처분하다니, 정말 큰 결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고, 자꾸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진짜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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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나의 자그마한 소원, 낙산사에서.

내 삶에 있어 이렇게 변곡이 많은 시간들은 2021년이 처음인 것 같다.
꾸준히 무엇인가를 해낸 것도 그렇고,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도 그렇고.

결국 나의 2021의 절반 이상은 실패의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처음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겪은 실패를 통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용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무언가(운동) 꾸준히 해냈고, 이를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유튜버의 말이 떠오른다.

Q : 미용업계는 엄청 힘들어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잖아.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았어?
A :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을 여기서 포기하고 그만뒀을 때, 내가 여기까지 인 사람이구나라고 나의 한계를 정하고 싶지 않아서.

많은 경험을 통해 맘고생 심하게 한 나 자신, 그래도 잘 버텨주어서 기특하고,
2022년에는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기를, 계획한 것들을 다는 아니더라도 천천히 이루어 내기를.

포기하지 않는 힘을 가지기를.